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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예식진 묘지명, 의자왕(義慈王), 의롭고 자혜로운 왕

by 딧플 2014. 9. 1.

"왕이 단 아래서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르자 울지않는 이가 없었다."


'의자왕이 끌려갈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이산에 올라와 많이 울고 통곡하고 임금을 부르고
그러니까 엄청난 통곡의 현장이었죠 임금님이 백제 유민들한테 위로도 해 주고 잘 갔다 돌아 오겠다는

돌아오겠다는 기약은 없지만 그런 슬픈 전설이 있는 산입니다' - 향토사학자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갈때

의자왕은 유왕산에 잠시 머물며 백성들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런데, 방탕군주가 잡혀서 끌려가는데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한다?

의자왕은 돌아오지 못하고 1,350여년이 지났죠



의자왕(義慈王)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라는 시호는 멸망군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호입니다.

더구나 삼천궁녀와 놀면서 백제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면 더욱 그렇죠



그런데, 시대가 흐를수록 궁녀의 수는 증가했습니다,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약 500여명, 고종때는 600여명, 그러면 백제때는 3,000여명???

그러면 의자왕의 그 많은 삼천궁녀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 

조선시대의 시적표현, 중국식 많다는 표현....



의자왕의 즉위 시기는 641년, 태자 융을 20살에 낳았으니 적어도 왕위에 오른 나이는 40대..

삼국사기에 "의자왕은 성격이 호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동증자"라고도 합니다. 효성과 우애가 깊다는 겁니다




의자왕은 정복군주


의자왕 20년동안 백제는 10여차례 신라를 공격합니다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하고 그리고 전쟁을 치루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전쟁의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전쟁에서승리하게 되면 국왕의 권위랄까 왕권이라고 하는것이 크게 강화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노리고 의자왕은 몸소 대신라전쟁에 친정을단행했다, 라고 볼수가 있다. 
그리고 40여개 성을일거에 장악을 함으로써 의자왕의 권위랄까, 
왕권의 위상은 크게 증대됐다,이렇게 볼 수 있다' - 이도학 교수



'고대 국가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은 왕의 통치의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내부적으로 의자왕의 정치가 내부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측에서 사생결단식으로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돈독하게 맺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외교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세력이 대동방제국 일환으로 당나라 편, 또하나는 당나라 입장에서 볼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이러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효과적인 후방에 병참기지를확보할 수 있었다고 봤던 것이다 
백제를 소멸시켜서 남북으로 협공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라의편을 들어 줬다고 볼 수 있다' - 이도학 교수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손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라의 입장으로선 이제 백제군을 코 앞에두었다는 얘기가 되게 됩니다.' - 김주성 교수



'뿐만 아니라 그해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사십여성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 삼국사기





마지막까지도 강성했던 백제는 왜 망할 수 밖에 없었을것인가? 


'백제 금동 대향로는 왕실의 최고의 물건이 됩니다. 
그런 최고의 물건이 누군가에 의해서 땅속에 묻혀진 채로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제대로 잘 보관되지도 못하고 땅 속에 묻힐 정도로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바로 백제가 마지막 망할 때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 부여박물관장

 
'신라측에서 사생결단식으로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돈독하게 맺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외교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세력이 대동방제국 일환으로 당나라 편, 또하나는 당나라 입장에서 볼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이러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효과적인 후방에 병참기지를확보할 수 있었다고 봤던 것이다 
백제를 소멸시켜서 남북으로 협공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라의편을 들어 줬다고 볼 수 있다' - 이도학교수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 결국망하게 되는데 당나라는 세계 최강의 군대,
대제국과의 충돌이라는 것은 백제의 멸망을 자초하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의자왕 아니라 걸출한 임금이 나왔다 하더라도 당나라와의 싸움은 승산이없었다' - 이도학교수



KBS 역사추적 의자왕 항복의 충격보고서, 예식진 묘지명
blog.daum.net/santaclausly/11793389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tracehistory/vod/review/1560676_28170.html







보신분도 계시겠지만, 놀라운 사실이죠,


백제 의자왕은 끝까지 항전하며 버틸 생각이었는데,

부하장수 예식이라는 놈이 왕을 묶어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해버렸다는 내용,


신 삼국지에서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가장 걱정한 것은 군사들이 먹어야 할 "군량"문제였죠,

원소 휘하의 허유가 배신하고 조조편에 붙어 원소의 장수 순우경이 지키는 오소의 군량고를 태워버리죠,

아무튼, 나당연합군의 가장 큰 문제도 '군량'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장기농성할 생각이었쥬


배신한 부하장수 예식(당명 예식진)은 당나라에서 고관대작을 거치며 잘먹고 잘살다가

아무나 묻힐 수 없다는 북망산천에 묻혔다고 합니다.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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