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역사추적(12.20)/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위키백과>
왕은 태자 융과 함께 8월 24일(음력 7월 13일)에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8월 29일(음력 7월 18일)에 의자왕도 항복했다 - <위키백과> (1910.8.29 경술국치일과 겹치는...)
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9E%90%EC%99%95
개인블로그 - 백제 의자왕의 항복의 비밀 예식진 묘지명
http://cyhome.cyworld.com/?home_id=a1595362&postSeq=3250590
2008
역사추적(12.20)/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http://office.kbs.co.kr/mylovekbs/archives/71013
(사진 - 백제 의자왕의 항복의 비밀 예식진 묘지명 - 개인블로그 율리님)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581359928
시사뉴스피플 2010.1.28
‘의자왕’과‘삼천궁녀’의 진실
마지막 순간까지 백성을 지키려 노력했던 비운의 왕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던 의자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의 다른 기록에는 전혀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이 백제에서 동방의 성인으로 인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의자왕은 632년(무왕33)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였다고 알려졌다.
의자왕은 그의 아버지인 무왕의 뒤를 이어 641년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했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 내신좌평 기미(岐味) 등 유력한 귀족 40여 명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다시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다 풀어 주는 민심수습책을 펼치는 등 국내 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전성기에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643년에는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항복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예식이라는 자의 배반 때문이었다. 구당서, 신당서에는 예식진이라는 자가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예식이 의자왕을 잡아서 항복해왔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료를 비추어 볼 때
의자왕의 충복인 예식진은 출세를 위해 주군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결론이 난다.
의자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ㆍ당 연합군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백성을 지키려고 했지만
자신의 부하에게 배반을 당해 끝내는 항복한 비운의 왕으로 남았다.
http://www.inewspeo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60
오마이뉴스 2011.11.14
의자왕의 삼천궁녀, 왜 <삼국사기>엔 없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을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숫자는 76만 호(戶)였다.
1호당 인구는 적으면 3명, 보통은 4~5명, 많아야 7명이었다. 중국의 경우,
한나라·수나라·당나라·명나라·청나라의 1호당 인구는 4.5~6.6명이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전기인 세종(재위 1418~1450) 초반에는 3.3명, 조선 후기인
현종(재위 1659~1674) 중반에는 3.8명이었다.
백제 멸망 당시의 1호당 인구를 4~5명으로 추정할 경우,
백제 인구는 304만 명에서 380만 명 정도였다고 계산할 수 있다.
멸망 당시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면 인구 1000명당 1명은 궁녀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 당시의 백제보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훨씬 더 컸던 조선에서도 삼천궁녀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록에서 궁녀 숫자를 살펴보면, 태종 때인 15세기 초반에는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성종 때인 15세기 후반에는 '최소 105명',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이었다.
위인전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는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17세기 후반의 궁녀 숫자는 300명 정도였다.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궁녀 증원을 감행한 영조(재위 1724~1776) 때의 궁녀 숫자는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684명이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5232
한겨레21 2010.9.13
의자왕은 승리할 수 있었다
치밀한 전술 대응…승기 잡았지만 내부 반란에 당해
측근에 사로잡힌 의자왕의 자결 시도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농성전을 이끌고 있을 때 웅진방어사령부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웅진방령 예식 장군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10일째인 660년 7월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의자왕이 항복하는 상황에 대해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제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라고 기록하고
신라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義慈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自雄津城來降)고 돼 있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고 했고
<삼국사기>보다 200년 앞선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에도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라고 기록했다.
특이하게도 의자왕이 항복하는 장면을 서술하는 데 <구당서> <신당서>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라
부하인 예식이 주체로 돼 있다. 사서는 중요한 사람 중심으로 기록한다.
특히 왕이 관련된 기사라면 당연히 왕 중심으로 서술한다.
<구당서> <신당서> 모두 왕 중심이 아니라 예식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예식이 뭔가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구당서> 기록의 의자왕 항복 기사 바로 뒤 융의 기사를 보자.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與諸城主皆同送款”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와서 항복했고 태자 융은 여러 성주들과 함께…)라고
태자 융이 주체로 기록돼 어색함이 없다.
그런데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라….”
의자왕이 측근인 수성대장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又將義慈來降’을 분석해보자. ‘又’는 또, ‘降’은 항복하다.
그러면 ‘將’만 남는다. 모든 상황은 將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왕을 將해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將자에는 명사로서 ‘장수’, 동사로서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문장으로 봐서는 동사로 해석해야 한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다? 왕을 데리고 가다? 무슨 뜻일까? 체포하다?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 바이근싱 산시대학 교수는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이라고 단언한다.
충격적인 해석이다.
당나라 대장군이 된 예식의 묘 발견
그런데 이 해석에 힘을 싣는 한 점의 묘지명이 2008년 중국 시안에서 발견됐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3품의 고위직을 지낸 예식진이었고,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유력 가문 출신이다.
백제 614년에 태어나 672년 58살의 나이로 사망한
예식진은 백제 웅천, 즉 현 충남 공주 출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바로 이 예식진이 웅진의 그 대장 예식이다.
웅진 성주 예식 장군은 18만 대군의 공격 앞에 고민 끝에 의자왕을 압박해 당군에 항복하고
그 공로로 당나라에 들어가 대장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허망한 항복의 이면에는 하극상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국가가 망했지만 모두 국력이 쇠해 망했다.
그런데 백제만이 전성기 때 느닷없이 망해버렸다. 요절한 국가! 백제,
그리고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의자왕! 예나 지금이나 전력이 비교되지 않는 국가 간의 전투는
일방적인 결과를 낳는다. 굳이 의자왕의 책임을 묻자면 대국인 당나라의 비위를 거스른 정도가 아닐까?
망국의 책임이면 족하다. 이제 ‘삼천궁녀’와 ‘호색한’으로 왜곡된 의자왕을 복권시켜야 하지 않을까?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41.html
의자왕(義慈王,의롭고 자혜로운 왕) <- 왕의 사후에 지어주는 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