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1.12] 1923 독립운동가/의열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

딧플 2016. 1. 12. 05:25


(사진 - 1월 12일 - 위키백과)





1)


타임라인 한국사앱에는

"1904 화가 이응로 출생"이라고 나와 있지만

음력입니다 (양력 1904년 2월 27일)


<위키백과>

이응노(이응로, 李應魯, Ung-no Lee, 1904년 2월 27일 ~ 1989년 1월 10일)는 

한국 출신의 프랑스 동양화가, 한국화가, 서양화가, 판화가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호는 고암(顧庵, 顧菴)·죽사(竹士, 竹史)이다. 

그는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D%91%EB%85%B8


<다음백과>

1923년 서울로 올라와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 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으며,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 상을 받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8a0204b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지만...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는 의미는 특혜를 받았다는 건데... 

이 분에 대한 자료찾기는 계속됩니다



2)


위키백과

"1903년 - 대한민국의 관료 이근직."이라고 나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자 입니다


(사진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1628

동화작가 샤를 페로 출생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7665&cid=40942&categoryId=33461

(사진 - 구글로고 - 2016-1-12)


샤를 페로 Google Doodle,샤를 페로 탄생 388주년 

https://youtu.be/EPnYJ2SdQGU




1665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 사망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7696&cid=40942&categoryId=33461


페르마가 들려주는 정수론 이야기 1/3

https://youtu.be/D8JMtCaWv8M




1906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출생 - 위키백과


강신주의 설렁설렁 철학강론,19 갈등,시간과 타자

https://youtu.be/k-qzxYjBzCI




1909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 사망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7055&cid=40942&categoryId=33468








1923

일제 강점기 조선의 의열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 위키백과



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23.1.14일자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3011400209203001&officeId=00020


(사진 - 독립운동가 김상옥 - 네이버캐스트 1890.1.5 ~ 1923.1.22)



ebs가슴 벅찬 우리 역사, 의열단 https://youtu.be/8Sq36JWvXjs

ebs가슴 벅찬 우리 역사, 김상옥 https://youtu.be/phB9yKznlGQ








1946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 - 타임라인 한국사앱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46.1.12 반탁기하에 부녀총결속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11200209202001&officeId=00020




1949

반민특위에 체포된 박중양 등에 대한 공판이 

서울 특별법원에서 열리다.이 중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긍정하고 

이완용은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하여 전국적인 논란이 되다.- 위키백과


(사진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49.1.13일자 특별재판소장 김병로씨담 민족총의로 위반자 처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49-01-13&officeId=00032&pageNo=1




1950

미국 국무부에서 방송담화를 통해 애치슨 라인을 공포하다.- 위키백과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50.1.12일자 미의 대극동방위선은 대만이동일본총승비율빈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50-01-12&officeId=00032&pageNo=1


<두산백과>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처음 언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외교문제 해결의 중책을 수행한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언하였다. 

방위선 밖의 한국과 타이완[臺灣]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6·25전쟁의 발발을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애치슨은 이 연설로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군사전략상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애치슨라인 [Acheson line]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9009&cid=40942&categoryId=31734

(사진 - 애치슨 라인 - 서울의소리 2014-6-25일자)


서울의소리 2014-6-25일자

[6.25특집] 에치슨 라인을 아십니까

'미국에 한국전쟁 발발 책임' 회자되게 만든 그 라인

http://amn.kr/sub_read.html?uid=14741&section=sc7




1950

서울 국제전신전화국 개국(링크없슴) - 타임라인 한국사앱(개국 x -> 확장 O)


<두산백과>

미국 RCA사와 회선 및 업무협정을 체결하고 시설을 인수함으로써 

1948년 12월 1일 국제통신사업이 출범되었다.

 이에 따라 체신부 전무국 국제통신분실을 설치하여 국제통신업무를 개시했다

전신회선은 서울과 샌프란시스코간, 서울과 마닐라간에 직통회선을 구성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간 전신회선의 예비회선으로 상해회선을 운용했다.


전화회선은 한국과 미국 ATT사간의 합의에 따라 서울과 오클랜드간에 직통무선전화회선을 구성하여 

한미간은 물론 미국 ATT사 중계로 남북미 각국과 태평양 제국 및 유럽 제국간 전화통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기술 부족 및 운용요원들의 미숙한 운영능력 때문에 몇 달 동안 RCA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국제전기통신사업이 시작된 이후 그 수요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으며 신생독립국가의 지위에 필요한 

국제통신의 중요성과 국제수지상 국제통신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50년 1월 12일 서울국제전신전화국으로 그 기구를 확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주적 국제통신 출발 

(기록으로 본 한국의 정보통신 역사 1, 2012. 8. 3., 진한엠앤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2272&cid=42348&categoryId=42349




1976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 사망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1220&cid=40942&categoryId=33451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https://youtu.be/v-pDle85w-8




1981

부산대,경북 의성군에서 1억년전 공룡화석 발견 - 타임라인 한국사앱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81.1.13일자 1억년전 공용화석 발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81-01-13&officeId=00020&pageNo=1




1989

한국 소련 은행, 사상 첫 신용장 개설 - 타임라인 한국사앱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89.1.13일자 한소 은행 첫 신용장 개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89-01-13&officeId=00028&pageNo=1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30.1.12 함흥남여양교생도 만세 불르며 시가행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011200209202001&officeId=00020


<다음백과>

광주 지역 학생들의 항일 독립 시위 소식이 알려지자, 함흥의 학생들도 동요되어 같은 해 

12월 16일 함흥고등보통학교·함흥농업학교·영생고등보통학교·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궐기하였다.

그러나 함흥고등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의 만세시위는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30여 명의 학생들이 

구속됨으로써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또한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시위 운동도 

학교 당국의 휴교 조치에 따라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0년 1월 11일영생고등보통학교에서는 아침 조회가 끝난 뒤, 

학생 대표가 광주학생들의 민족운동 지원 연설을 하자, 학생들은 시내로 뛰어나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 시위대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로 달려가 궐기를 촉구, 양교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격렬하였다.


함흥상업학교학생들은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자극되어 

광주학생운동 지원과 총독정치 반대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11일에서 14일 사이에 여러 번 회합을 가지고 

“모여라 ! 싸워라 ! 피압박 민중이여 ! 삼천리강산을 붉은 피로 화장하더라도 싸워라. 조국을 위해서” 등의 

격문을 작성하였다.그리고 1월 14일 조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교문을 뛰쳐나와 

깃발을 휘두르고 격문을 뿌리면서 가두시위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의해 학생 20여 명이 

현장에서 붙잡히고 주동 학생 최예진(崔禮鎭) 등 5명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2302



<두산백과>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데서 양 민족 학생들의 충돌이 시작되어 

11월 3일 광주에서 대대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에서는 1929년 12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 

경성제대, 중동학교, 경성여상, 동덕여학교, 중앙고보 등에 시위를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되었다.


그리고 1929년 12월 5~14일 남학생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학생들도 일부 시위에 참가했고 

이화여고보에서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조기 방학으로 무산되었다.


1930년 1월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자 1월 12일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김진현, 최윤숙이 근우회 서무부장인 허정숙을 방문하면서 시울 시내 여학생 연합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화여고보 학생들은 허정숙에게서 다른 여학교의 연락 가능한 인물을 소개 받아 연락을 시작했다. 

1월 14일 밤 송계월의 집(경성여상, 가회동 48번지)에서는 각 여학교 대표자 회의가 열렸고, 

최성향의 집 (근화, 소격동)에서도 여학생들이 회합했다가 서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송계월의 집으로 가서 

연대하면서 1930년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시내 여학생들이 조직적으로 항일 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 사이에 여학생들은 구호를 정하고 플래카드를 만들고 태극기와 적기, 시위에 쓸 유인물 등을 제작했다.


시위를 벌이면서 이들이 내세운 구호는 <학교는 경찰의 출입에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모두 석방하라, 조선의 청년학생들이여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라,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였다. 이 구호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 이전 학생들은 동맹휴학 등을 

통해 주로 식민지교육 정책에 반대해 왔는데 광주학생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은 민족해방의 구호를 뚜렷이 

내세우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여학생만세운동 전개과정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신여성문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3092&cid=49233&categoryId=49233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1.12 반미-반일 열풍속의 태국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11200329203001&officeId=00032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89.1.12 "현대 노동자 피습' 국회서 규명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89-01-12&officeId=00028&pageNo=1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92.1.12 정신대 모집-관리 일본정부 주관 입증 극비문서 발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92-01-12&officeId=00028&pageNo=1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93.1.12 민자"거대 관변단체" 추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93-01-12&officeId=00028&pageNo=1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95.1.12 "제발 때리지 마세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95-01-12&officeId=00028&pageNo=1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한겨레신문 1999.1.12 소설로 되살아난 "허난설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99-01-12&officeId=00028&pageNo=1